휴일 오후
2015. 3. 23
ㅣ 어둠 속의 대화
90분을 생전 겪어보지 못할 어떤 세계와 접해볼 수 있다는 공연이 있다고 해서 북촌 가회동을 찾았다.
서울에 똑같은 공연장이 세 곳이 있다는데 별로 알려지지 않은 채 홍대 다음으로 이곳 북촌에 최근 문을 열었다고 한다.
물론 그만큼의 관심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리라.
건물에 박혀있는 이 글씨가 건물명이자 상호이며 공연명이다.
그러니까 [어둠속의 대화]는 오늘도, 내일도, 한 달 후도, 1 년후도, 10 년후도 똑같은 공연을 한다는 이야기다.
처음 입장을 하고서 내게 바로 와 닿는 느낌은 어디선가 경험이 있는 세계였다는 점이다.
생소하지 않고 낯설지 않게 다가서는 어둠,
100% 어둠속 의식불명의 깜깜함은 바로 재작년에 경험했던 그 세계였다.
간성혼수로 인해 10여 일간의 의식이 없던 상태의 무의식의 세계, 그 깜깜함이 되살아 났다.
물론, 수술을 받은지도 몰랐고 그 당시에는 그러한 느낌조차도 몰랐지만 중환자실에서 깨어나고서부터 까끔씩 기억나는 단편적인 것들 중에서
깜깜한 어둠은 안온한 느낌이었으며 음악소리, 청아한 목소리, 노란 색깔의 긴 복도, 내 이름과, 날짜와, 아내와, 딸아이의 이름을 반복해서 물어보는 간호사의 존재가 다시금 생각나는 것이다.
두려움과 거부감은 없었고 오히러 평온해지는 어둠이 어떻게 전개될지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공연은 빛의 안내자가 어둠의 안내자에게 관객을 인계하면서 시작된다.
관객은 공연속으로 직접 들어가 체험하면서 90분을 어둠의 안내자와 함께 하는데
어둠 속을 안내자의 설명하는 소리 방향, 지팡이, 그리고 발과 손으로 바닥과 벽, 혹은 난간을 스치고 더듬으며 각종 스토리와 만나게 된다.
깊은 산, 골짜기를 걷는 테마에서는 숲 속의 향기와 바람을 느끼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지팡이와 손더듬, 앞사람의 체취와 안내자의 설명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그렇게 숲속을 지나고 꽃향기가 피어나는 드넓은 벌판으로 나와서는 잔디밭을 거닐기도 하며
파도가 뱃전에 철썩이는 바다의 선상에서는 차가운 물방울을 얼굴에 맞아가며 배의 흔들림과 기관 소리를 듣기도 하고
닫혀있는 대문을 열고 들어가 한옥의 대청마루에 누워보기도 했다.
카페에 들려서 음료를 마신후 그 음료를 맞혀보는 게임도 하였는데
음료의 상표를 눈으로 봤을때와 보지 않고 맞추기란 맛에서도 구분 짓기 어려워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광명인가를 깨닫게 했다.
이 모든 스토리로 이동하는 길은 되돌아 서거나 굴곡이 지고 좁거나 넓어지는 길이었는데
앞으로 나아가는 수단은 본인 스스로의 감각과 안내자의 대화하는 소리에 의해서 였다.
후각과 청각, 미각, 그리고 신체의 감각에 의해서 어둠 속의 체험은 90분으로 끝이 나고
빛의 안내자에게 다시 인계되기 전 어둠의 안내자는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어둠 속을 지나오면서 안내해준 자기는 관객과 각 관문이 보였을까, 아니면 여러분과 똑같이 보이지 않았을까를 물었다.
난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 대답하려는데 여기저기서 보였을 것이라고 대답이 튀어나왔다.
안내자인 그녀는 평생 빛을 볼 수 없는 맹인이라면서 사고로 인한 후천성 시각장애인이며 이 공연 속 어둠의 안내자 모두가 맹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체험한 각 스토리의 테마는 다소 미흡한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우린 시각장애인의 일상을 겪어보는 공연 속 경험을 한 것이다.
어둠 속의 대화는 안내자 [백다솜/27세]양의 인사로 끝이 나고 우리는 다시 빛의 세계로 컴백했지만 그녀의 밝은 심성과 긍정적인 미래관을 잊을 수 없을 것 같고 그녀가 십 수년 봐 왔을 빛의 세계에서 어둠의 세계로의 나락이 어떤 고통과 한 인지를 생각나게 했다.
그리고 어둠은, 태초의 빛이 무엇으로부터 어떠한 색깔로 시작되었는가를 생가하게 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현대미술관에 들려 8 개관의 전시를 감상하고서 해 떨어지는 궁궐을 바라보다 북악 스카이웨이로 방향을 잡았다.
그래도 휴일의 시간은 여분이 있길래 아차산 동쪽 광나루길 지나서 언덕배기의 한 한옥집을 찾았다.
나그네
박목월
강나루 지나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
가는 나그네
박목월의 시 [나그네]가 떠오르고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사랑이 전설처럼 살아나는 아차산 중턱 아래
한강은 빛의 야경 속에서 봄의 색깔을 반짝임으로 선명하게 노래하고 있었다.
그러나 쌀쌀함이 감도는 이른 봄의 봄밤이 아직은 설렘이 아니어서 좀 더 무르익은 봄 향기를 기다려야 할 것 같아 귀가하기로 하고 한강의 강변을 탔다. 휴일 오후는 또 그렇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