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흥망성쇠
2015. 12. 30
― 사진은 1899년 3000년 전 은나라 수도였던 은허(지금의 산둥)에서 발굴된 한자의 원형이며,
같이 출토된 인골과 유품에서 은나라는 동이족의 나라이며 한자는 동이족의 글자였다고 중국의 사학자들이 인정했다.
한글과 한자는 본래 쌍둥이로 태어난 쌍둥이 글자였다.
지금도 한자의 발음은 한글에 의해서 발음된다.
은자(한자)를 만든 사람은 창힐이고 창힐은 동이족 사람이다.
ㅣ 나라의 흥망성쇠
상해 임시정부 국가주석 김구 선생이 평생 나라를 위해 몸 바치고 대의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신 것은 오직 하나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평생을 지니신 까닭이다.
상놈의 자식으로 태어나 배움의 길이 없었던 창암(아명)은 건달 같은 아버지가 가난 속에서도 자식의 앞길을 염려하여 서당을 열어 서당 선생을 초빙하지만 돈이 없어 몇 달을 지속하지 못한다. 창암은 왈패였던 아버지의 기질이 그대로 이어져 배움의 갈구로 표출되는 크고 작은 욕구들이 잦은 싸움으로 이어지며 근동의 악동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아버지는 이러한 아들의 방패막이로 자신이 드나들던 감옥의 옥졸들과 감영의 장교들하고 친해진다.
무언가에 대한 끝없는 갈망으로 책이 보이면 읽고(귀한 까닭에) 불만이 쌓이면 방랑하였다. 그러다가 동학을 만나 입도하게 되면서 이름을 창수로 개명한다. 18세에 동학 황해도 접주가 되어 포수들로 구성된 부하들을 이끌고 구월산에 들어가 왜놈(왜병)들의 창고를 털어 식량으로 삼고 동학란에 휘말린다.
결국 동학운동의 실패로 20세에 청계동 안진사(안중근의 부친)를 찾아갔는데 거취를 염려하여 사랑채 손님으로 대하고 부모님을 청계동으로 데려오게 한다. 이곳에서 그의 평생을 있게 한 스승 산림 고능선을 만나게 된다. 고산림 역시도 안진사의 초빙으로 청계동에 들어왔으며 안진사의 사랑채 손님이었다. 고산림 스승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그의 사랑채에도 들어가 숫한 견문을 익히고 배움을 얻었다.
자신의 어린날을 되돌아보고 어느 때부턴가 자신에게 다짐했던 「순하게 살자」의 신조를 스승에게 말하고 이를 들은 스승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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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수 반지 무족기 현애 철수 장부아
"나무에 오를 때 가지를 잡는 것은 족히 이상한 것이 아니며, 벼랑에 매달려 손을 놓는 것은 가히 장부로다" 하시며
"예로부터 아무리 나라가 크게 흥했더라도 망하지 않은 나라는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더라도 천하에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경우가 있다. 어느 나라의 국민이 의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요,
그와 달리 국민이 여러 패로 갈라져서 한 패는 이 나라에 붙고 한 패는 저 나라에 붙어서 외국에는 아첨하고 제 나라 동포와 싸워서 망하는 것이 더럽게 망하는 것이다. 이제 왜의 세력이 전국에 뿌리를 내려 그 마수가 대궐 안에까지 침입해서 적이 우리나라의 대신을 마음대로 내치고 들이게 되었으니, 이 나라가 제2의 왜국이 아니고 무엇인가.
만고에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고 천하에 죽지 않는 사람이 있으랴만,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 목숨을 바쳐서 나라에 보답하는 한 가지 일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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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르침처럼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으로 독립하기를 그렇게 원했기 때문에 민족진영을 이끌면서,
공산주의 노선을 택한 빨치산 진영과,
황실을 고집한 군주제 진영을 다독이면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일본군의 수뇌부를 암살해 전 세계에 대한민국은 자주독립국임을 알리고 국민들의 자각을 일깨웠다.
교육을 장려하고 문화를 일으켜 유구한 역사를 자랑스럽게 이어가기를, 대한의 이념으로 삼아 자주독립을 원하였던 김구(또 한 번의 개명) 선생의 신념처럼, 아니 고산림 선생의 가르침처럼, 지금 우리는, 우리의 지도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자주 대한민국으로 이 나라를 잘 이끌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 한탄을 금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작년에 세계에서 1등으로 무기 수입국이었다. 대부분이 미국산인데 한물간 기종이 많다. 첨단 기종은 없고 재래식의 제고품 정리를 해준 것이다. 10조 원이 넘는 세금이다.
왜, 그러한 것인가?
무슨 연유인가?.
이번 외교장관 간의 한일협정도 그렇다.
일본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무엇이었는가?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과 배상이었다.
살아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말 한마디 들어보지 않고 국민적 합의도 없이 미국의 입김 아래 일본의 간교함에 빠져 졸속으로 처리됐다.
안으로 국민을 무시하고 밖으로 외국에 빌붙혀 나라의 미래를 암울하게 하는 독단적 사대는 이제 그만하자.
중국은 난징대학살의 현장이 발견됐을 때 개발을 중지하고 그 자리에 전시관을 세워 지금까지도 자료와 증언을 수집하고 전시물을 만들어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고발하고자 산역사의 장으로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노력을 정부차원에서 조금이라도 하고 있는가. 민간이 주도한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을 협상 이면합의로 이전하고자 국민을 호도했다니 이 정부는 아직도 일본의 주구이고 앞잡이이며 미국의 식민지인가?
중국의 자주적인 역사의 현실인식을 부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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