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남애

홍률 2017. 4. 8. 05:14

 

 

2017. 4. 2

 

 

 

 

 

 

ㅣ  남애

 

 

새벽에는 눈발이 날리더니만 종일 햇볕이 따스하니 좋다.

남애는 벌써 3년째 가영이를 따라 틈만 나면 찾아들어 이젠 롱 비취 식구들과 인사를 나눌 정도가 됐다.

 

 

 

 

 

 

 

 

 

 

 

 

어젯밤엔 잠을 설쳐 새벽에야 간신히 잠이 들려고 하는데 눈이 내린다고 사람들이 웅성거려 방에서 나오니 정말 눈이 날리고 있었다.

멍한 눈으로 눈발이 내리는 바다를 바라보니 서퍼들은 벌써 파도를 파헤치고 있다.

밖의 웅성거림도 서핑 옷을 갈아 입고 바다에 들어갈 옆방 젊은이들의 환호였으며 상쾌한 아침의 건강미였다.

 

 

 

 

밤새 가려움에 몸을 긁적거리다 잠을 놓쳐버린 몽롱한 의식이 확 깨어나면서도 차가운 새벽 바닷바람이 싫어 방으로 들어와 다시 잠을 청하는데 아침밥을 먹으란다. 이제 막 해낸 밥이며, 김치찌개가 별미로 느껴지며 식욕을 돋아 맛있는 아침식사가 되었다.

 

식사 후 꿀맛 같은 잠 속에 빠져 오전을 보냈는가 보다.

가영이가 젖은 서핑 옷을 갈아입고서 시장 보러 가자고 재촉하고 있다.

밤새 제주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더니만 어느새 바다에 들어갔다 나왔는 모양이다.

3시간여 파도와 부딪치니 기분이 상쾌하다고 한다.

역시 젊음은 건강이고 건강은 행복이다.

 

주문진으로 가 회를 뜨고 잡어 매운 탕감을 더 샀다.

생선의 선도가 좋아 아까 돔과 삐득삐득 말린 조림용 가자미도 서울로 가져가기 위해 더 챙겼다.

 

 

 

 

주문진을 갔다 오니 롱비 취의 남,여 서퍼들은 그들만의 스케즐을 즐기기 위해 이미 떠나고 없었다.

우린 남아서 매운탕을 끓이고 회를 먹으면서 점심을 즐겼다.

롱비취의 사장과 아직 떠나지 않은 아가씨 서퍼도 야외의 봄 햇볕 속 오찬을 함께하면서 회와 매운탕은 지나치기 싫은 유혹이라며 술잔을 건네며 깔깔 웃는다. 주문진을 갈 때만 해도 인원이 많아 넉넉히 장을 봐 왔는데 더러 가버린 팀도 있고 해서 인근 물치항 쪽에서 서핑을 하는 제주 친구들을 가영이는 부르고 있다.

 

소주와 함께하는 이른 봄의 야외탁자는 새벽의 눈발은 거짓말처럼 따스한 봄볕이 내리쬐고 있다.

포만감이 나른하게 밀려든다.

가영이는 다시 바다로 향하고 봄 햇볕이 감미로워 실내에 들기는 싫어서 텐트를 쳤다.

서쪽의 햇볕을 받고 바다로 향한 쪽의 텐트를 걷어 올려 끝 간 데 없는 수평선을 바라보니 가슴속이 뻥 뚫린 것 같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맑은 공기와 푸르디푸른 파란 하늘 위로 새하얀 구름은 더 없는 오늘의 선물인가 보다.

비예보를 무릅쓰고 여기에 오기를 무척 잘한 것 같다.

 

제주의 빡빡이와 일행 3명이 텐트로 와 인사를 하면서 잘 먹겠다고 외친다.

제주에서 만났을 때완 또 다른 반가움이 인다.

상당한 량의 음식들이었는데 깨끗이 비웠다고 전해 들으니 흐뭇했다.

 

 

 

 

서울에서 출발하면서 물회를 먹고 오자고 했었다.

그래서 가영이가 몇 번 가본 적 있는 잠수부 집을 향해 롱 비취를 떠나 속초로 향했다.

아바이마을을 지나 동명항을 우측으로 두고 흐르면서 영랑 해안길의 봉포 잠수부 집을 찾아드니 구건물은 그대로 두고 신축건물에서 신장개업을 했다. 입구와 영업장 곳곳에 화환과 화분이 즐비했다.

꽃의 향연 같은 착각 속에 모둠 물회와 회비빔밥과 오징어순대를 시켜 저녁밥을 먹고서 느긋하게 귀경길에 올랐다.

 

이곳에 오면 항상 생각나는 친구가 있고 또, 기억하기 싫은 사연이 있다.

어두워져 가는 설악산을 바라보면서 오늘은 식구들에게 30여 년 전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하였다.

이여사도 기억에는 있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를 처음 듣는다며 만일 그때 그렇게 하였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 정착해 살고 있겠지라며 웃어넘겼다.

 

잊을 수 없는 친구는 박노현이다.

지금은, 설악산 울산바위(흔들바위) 앞에서 둘이 찍은 사진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신흥사 돌담 밖에서 막걸리로 이별주를 나누며 태평양 전쟁사의 태평양전쟁의 국제재판(1968년) 결과에 분노하고 일본왕의 거짓 항복문서를 의문시하며 만주 일본군 의무부대, 731부대의 조선인 마루타에 대한 격분과 눈물의 비애를 함께 토론했었다.

제약회사의 과장으로 근무하다 처가와 함께 호주로 이민 간다며 한 달여의 국내 여행길이라고 했었다.

아마 지금쯤은 성공한 호주이민 1세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성수동 작은댁으로 편지가 두어 번 왔드랬는데 지방을 전전하다가 답장의 시기를 놓쳐 그 이후 무소식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설악은 그리움이다.

 

또 하나 기억하기 싫은 설악의 사연은 설악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지만 사람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을 때 생기는 허무와 허전한 감정이다.

마치 아침이슬의 덧없음과도 같이 반짝거리는 짧은 생명력이다.

용두동에서 펀칭을 하고 살던 때이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 대책도 없는데 일감을 끊고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칼로 무 자르듯 돌아서는 사람들을 보았다.

더구나 투자했던 자본금에 대해선 일언의 말 한마디도 없었다.

그렇게들 그들은 그들대로 수 십 년을 적대하고 지냈지만 말이 좋아 창업이고 동업이지 그들 3명이서 시작했는데 둘은 자본금도 없이 참여했고, 그중 한 명은 방세를 털어 자본금을 됐었다.

그런 그들이 나눠 먹기식 거짓 부도를 낸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런 상황이 마른하늘에 청천벽력이었다.

앞이 감 깜 했다.

건강(간경화) 때문에 영전에서 요양하고 올라와 오락실 지배인을 하면서 서초동에 호프집을을 열려고 준비하던 중 그 사람들의 제의와 설득력에 못 이겨 펀칭을 선택하였는데 이제 오갈 데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전세금과 공장 정리비를 가지고 설악으로 들어가자고 집사람을 설득한 것이다.

그 사람들과는 살아갈 날이 더 많기에 관계를 쉬 끊을 수 없어 세 사람 앞에서 나의 진실을 말하고 일단락을 지어 버렸다.

설악산으로 들어간다고 하니 경원이와 누나가 극구 반대했다. 아마 애엄마가 이야기를 했겠지....

결국은 동생과 매형이 마련해준 돈으로 먹는장사를 화양리에서 처음으로 시작했다. 나는 전시장 공사의 감리를 보면서.

 

그래서 시작된 이여사의 질곡 된 삶이 이어지고 손이 마를 날 없이 밥을 지어야 하는 일생이 되어 버린 것이다.

회한의 정이야 목에 가시처럼 콕콕 찌르지만 하루를 견디며 버터내야 하는 인생이기에 암울함 보다는 긋긋함으로 사람의 본성에 따라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래서 설악은 두 개의 추억이 있고,

붉은 단풍이 있으며,

내밀한 생명력의 봄햇살과,

뜨거운 태양 아래 차갑고 넘쳐나는 골짜기의 서늘한 물과 녹음 우거진 그늘진 한 여름이 있으며,

육각형의 결정체를 지닌 눈 덮인 봉우리가 있는 것이다.

 

반달이 밤하늘에 솟아있다.

대기는 차갑고 별무리는 아름답다.

샛별(금성)을 등대 삼아 어둑한 골짜기와 깊은 산들을 밀어내고 터널과 헤드라이트로 이어지는 산속의 도로를 질주하고 있다.

 

오늘은 왠지 기분이 좋다.

북한강의 건너편 불빛도 좋고,

롯데타워의 각선미 있는 조명도 좋다.

한강의 도심 야경도 너무 좋다.

4월의 봄날이 너무나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