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은 떠 오르고.

[스크랩] 영전리 지명변천사.

홍률 2009. 12. 10. 19:53

 

 

 

영전의 옛 이름을 자로 쓰고 있는 친구가 있어 친근함이 더해진다.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고향의 상식이라 생각하고 변천된 지명을 몇 가지 소개한다.

기록화된 (영암, 해남 정관 사료집) 영전의 집촌은 고려초에서 시작된다.

북평에서는 오래된 마을에 속하며 북일의 선사유적이 있음을 상기하면 그 이전에도 주거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음 직하다.

왜냐면 강기장뚱(장뚱은 큰 무덤의 우리말)을 주변으로 암 평, 구랍(굴 앞), 학교 주변은 과거 1000호의 주거지였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명에 있어서 고증된 옛 이름들은 다 알 수 없고

임진왜란 7년간 이 나라를 구한 너무나 인간적이며 성웅이신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영전의 옛 이름이 기록되어있어 발취하여 기술한다

 

명량해전의 기간인 1597년 8월 27일부터 9월 16일까지의 난중일기중 8월 24일 자를 보면은

 

24일   맑다,  아침에 괘도포(掛刀浦)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낮에 어란포 앞바다에 이르렀다

          가는 곳마다 마을이 텅텅 비어 있었다

          바다 가운데서 잤다.

 

송찬섭 엮어 옮긴이의 주 해석에 따르면

괘도포 (掛刀浦)     전남 해남군 북평면 영전리, 또는 남성리로 추정된다.

 

라고 했는데 남성리는 활 구미, 또는 칼 구미 라 불리어졌기 때문에 엮은이의 착각이 아닌가 싶다.

왜냐면 수군통제사가 아침을 먹을 수 있는 넓은 포구와 전란 중 마을을 지키고 있을 만한 규모는 영전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목넘이에서부터 산대, 성안재, 로 이어지는 산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한때는 양포  로도 불려졌으며 주변의 섬인 노화도, 보길도, 등 해상교류의 역할로 번성하기도  했다

윤도산의 정상에는 작은 집터와 조개껍질, 숫, 질그릇 파편 등 사람이 집을 짓고 살았던 흔적이 있는데 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고산 윤선도 가 제주도와 보길도 등 은둔지를 물색하며 지냈다는 옛 어른들의 가르침이 있기도 하다.

마을이 쇠퇴의 길로 접어든 연유는 두 가지로 추정되는데,

하나는 역병이 창궐하여 마을에 불을 놓아 불태웠다는 것과,

또 하나는 푸대접을 받은 괴승의 농간으로 구랍과 도리섬을 흙으로 메꾸워버린 대공사로 인해 포구의 물 흐름이 변해

모래와 펄이 적체되는 쓸모없는 포구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역사성 때문일까?  영전 선창(포구)은 제2종 항으로서 군이 아닌 도의 관리를 받는 선창이다.

 

이후 밭이 많고 오래된 부락이라 하여 전 옹 (田翁)리로 불리기도 했다.

밭 전 (田) 자 할아비, 또는 어르신 옹 (翁) 자에서 알 수 있듯이 예부터 많은 인구가 살았음을

서호정 (井), 또는 서구 정 (井)의 지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서쪽 우물터라는, 물을 필요로 하는 추정에서이다.

 

지금의  영전 (永田)이라는 지명은 150여 년 전 이 씨 성을 가진이가 자기 이름 가운 데자인 영 (永) 자를 마을 이름으로 써서

 생겨났다고 한다.

숙희의 자인 전홍이는 전 옹이 보다도 예쁘다.

 

 

메모 : 2009. 4. 21. 고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