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은 떠 오르고. 48

눈은 내리고

2021년 1월 10일 며칠 전 저녁 무렵에 눈이 내렸습니다. 온통 새하얀 세상이 되어 골목에도 건물에도 나무에도 소복소복하며 포근이 쌓이는 눈이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눈이 오는 모습을 많이 봐 왔지만 이렇게 감흥에 젖어 한참을 지켜 봐 주기란 근래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가로등 불빛으로 눈이 내리는 풍경은 먼 옛날을 상기시키며 샘 골목 담벼락 너머 검은 감나무 형체 사이로 아련히 날리는 하얀 눈송이들의 정겨움이 새삼 묻어나 어린 시절로 나를 이끌었습니다. 유난이도 우리 어릴 때는 눈이 많이 쌓였습니다. 그렇게 눈이 내리던 밤 구불청 노화도에서 이사 온 금옥이네 작은방에서 모두 이불속에 발을 모아 두고 땅콩과자를 먹으면서 마냥 깔깔대고 까르르 웃으면서도 주제도 없는 이야기에 그냥 좋아했던 그 시절이 그립..

꿈으로 오는 한 사람

2020. 9. 19 꿈으로 오기를 바랐습니다. 가끔은 그렇게 기다리면서 정녕 찾아들기를 바랐습니다. 새하얀 웃음으로 바라만 보다가 그냥 돌아 선다 해도 섭섭한 마음이 일 것 같지는 아니한 그러한 한 사람이 깊은 꿈속으로 오기를 바랐습니다. 같이 했던 포근함도 함께했던 짖꿎음도 아련이 꿈으로 다시, 다시금 일렁이면서 어둑한 산기슭 아래 산야초 엉클어진 숲길을 따라 달이 뜬 가을밤 흰 이슬처럼 흔적 없이 젖어들기를 바랐습니다. 꿈으로는 늘 그곳이 동네 까끔의 그늘진 설밑이었고 몰고리 골짜기 또랑 물소리 돌돌 거리는 쉼 바탕쯤이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해저녁의 큰 골! 소떼와 같이 빠져나오는 초입인가도 모르겠습니다. 소싯적의 추억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음이 지금도 꿈으로 오는 한 사람을..

優囚 우수

2020. 2. 21 미스터 트로트에서 14세의 정동원이 남진의 1967년도 노래 '우수'를 불렀다. 레전드로 나온 남진이 박자, 음정, 감정이 너무도 완벽한 천재라며 극찬을 했다. 우수 ㅡ 노래를 들으며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나 자신과 그때의 남창, 돔바퀴 골목 그리고 달도 다리와 선창이며 우수를 즐겨 부르던 기봉이형 친구 남창 영수형이 생각나고 정훈희 노래 '안개'도 같이 떠오른다. 같은 감성이 현빈과 탕웨이의 영화 [만추]에서 탕웨이가 시애틀의 안개속 거리를 헝클어진 머리로 두툼한 코트를 입고 걷는 모습에서 애처로이 느껴져 역시 '우수'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긴적이 있는데 그때의 느낌도 되살아 난다. 優囚 동여 맨 머리카락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눈동자 시선 말을 하고픈 메마른 입술 쓸..

오늘은 왠지 그렇습니다

2019. 9. 7 때늦은 장마가 이어지더니 내일은 태풍 링링이 우리나라 서해를 지나간다고 합니다. 중량급을 너머선 강한 태풍이라고 하니 걱정이 되네요. 과일과 곡식이 익어가는 시기라 많은 손실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옆집 담장을 타고 벽체로 뻗어 나가는 나팔꽃 줄기가 꽃과 함께 선명합니다. 궂은비 내리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흐린 날씨가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왠지 모르게 서글퍼지는 건 주변의 사람들이 작은 일상의 행복을 누리며 그저 평안하였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에서 입니다. 아내도 무거운 몸 움직임이 가벼이 건강하였으면 좋겠고 몇몇 친구들의 식구들이 병환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격려와 용기로써 꿋꿋하게 이겨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며 무엇이라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하는지 안타깝습니다. 누구나 병마는 찾아들..

여름의 끝자락

2019. 8. 20 저녁밥상 덕석머리 마당에는 도리방석에 고추가 널려있고 한쪽으로는 녹두 깎지를 말리느라 비닐천막을 잇대었다 저녁나절 해는 달마산 꼭대기에 기울어 금빛 바다 붉은 노을은 수평으로 찬란함을 더하는데 고추잠자리는 하늘 높이 맴을 그리고 방 낮의 더위는 어디로 가고 서늘한 바람은 뒷집 담 넘어 앞집 감나무 감잎을 스쳐 지나간다 8월도 끝자락 상사화는 피웠건만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해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상사화 꽃이 필 때 잎이 없고 잎이 자랄 때는 꽃이 피지 않아 서로 생각만 하고 볼 수 없음이 늦여름 불타는 태양의 계절이 가고 열매가 익어가는 언덕배기 나무 아래로 벌레소리 가을을 재촉하는 것 같아 부질없게도 마음 졸이며 그렇게 피어나는 꽃 여름의 끝자락에 서서 가을은 산들바..

談泊 담박

2019. 7. 28 해남 대흥사 대웅전의 대웅보전 현판 이광사의 동국진체이다. 해남 미황사 전경이며 뒤로 보이는 절경이 달마산 문바위다 미황사의 대웅전이 옛 모습 그대로 보전되어 왔으나 이제는 어찌할 수 없어 2022년 1월 1일부로 복원 작업에 들어가 3년여의 시간을 요하여 공사가 진행된다고 한다. 복원 후에는 대웅전의 규모가 좀 더 커 지리라 기대한다. 丁若鏞 정약용 1762~1836 談泊爲歡一事無 담박위환일사무 異鄕生理未全孤 이향생리미전고 客來花下휴詩券 객래화하휴시권 僧去狀間落念珠 승거상간낙념주 菜莢日高蜂正沸 채협일고봉정비 麥芒風煖稚相呼 맥망풍난치상호 偶然橋上逢隣수 우연교상봉린수 約共偏舟倒百壺 약공편주도백호 담박함을 즐기니 한 가지 일도 없어 타향에서 산다 해도 외롭지만은 않네 손님 오면 꽃밭에서..

형제

2019. 7. 7 부산에 사는 셋째 동서가 보고 싶다면서 만나자고 해 둘째네 성환에서 1박 2일을 보냈다. 처갓집 쪽으로 세 자매가 모인 셈이다. 넓은 공간에서 고기도 굽고 술도 권하면서 밤이 늦도록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냥 좋다. 마냥 좋은 것이다. 형제끼리 만나 서슴없이 웃고 떠들며 집안 사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잡다한 사설들을 나누며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마음에 풍요는 멀리 있는 게 아니고 나의 일상, 내 주변의 사소한 삶에서 얻어지는 것 같다. 밤을 세우고 근동의 안성 서운산 청룡사를 갔다. 작년에 화재로 대웅전이 소실되어 복원 공사로 인해 가설 가림막이 들어서 있고 경내는 스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서운산 줄기는 나지막한 굽이굽이 여러 줄기로 나누어져 크고 작은 골짜기..

혹시나 하는 것

2019. 6. 29 오늘 트럼프 미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국빈 방문합니다. 미래 대한민국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시기에 급박하게 요동치는 국제정세와 북한 관계, 국내 경제의 숨통을 풀어나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DMZ에서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이라도 만나 남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면 우리의 무리한 기대일까요. 혹시나 하는 것은 미래로 가는 대한민국의 국운이 금년에 열리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 계기가 오늘과 내일에 달려있으며 감짝스럽고 슬기롭게 성사되기를 희망합니다. 한반도 평화는 민족의 염원이며 남북이 결집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북방으로의 진출은 우리 민족 역사 뿌리를 찾는 시작이며 민족 웅비의 출발입니다. 추억은 아름답습니다. 어느 땐가 나를 대신해 노래를 불러주던..

세월

2019. 6. 11 나무를 기부받아(2013년) 터널길을 조성한다던 양재천 둑길은 어느덧 수 십 년이 지나 이제는 숲이 되어 하늘을 가린 숲길이 되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무심한 세월! 오늘도 십여 km를 걸으면서 새삼스레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이 너무 좋아 폰에 담아본다. 매일같이 걸었던 길. 오늘따라 흐른 날씨에 기온은 선선해서 걸음이 더딘 까닭으로 해서 평소에 지나쳐 버리던 구간과 눈에 익은 나무들이 친근하기만 하다. 검게 익은 오디들이 무수히 떨어지는 산뽕나무. 봄날, 그렇게 화사했던 왕벚나무의 벚꽃들은 지고 이제는 바닥에 떨어져 얼룩을 남기는 잘 익은 버찌들이 바람에 갈리운 우박처럼 경계석 한편으로 휘몰아쳐 초하의 숲 속 길을 마중하고 있음이다. 밤꽃도 피어 가지는 늘어지고.....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