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은 떠 오르고.

談泊 담박

홍률 2021. 12. 30. 12:50

 

 

2019. 7. 28

 

 

해남 대흥사 대웅전의 대웅보전 현판 이광사의 동국진체이다.

 

 

 

 

해남 미황사 전경이며 뒤로 보이는 절경이 달마산 문바위다

미황사의 대웅전이 옛 모습 그대로 보전되어 왔으나 이제는 어찌할 수 없어 2022년 1월 1일부로 복원 작업에 들어가 3년여의 시간을 요하여 공사가 진행된다고 한다.

복원 후에는 대웅전의 규모가 좀 더 커 지리라 기대한다.

 

 

 

 

丁若鏞 정약용     1762~1836

 

 

談泊爲歡一事無          담박위환일사무

異鄕生理未全孤          이향생리미전고

客來花下휴詩券          객래화하휴시권

僧去狀間落念珠          승거상간낙념주

菜莢日高蜂正沸          채협일고봉정비

麥芒風煖稚相呼          맥망풍난치상호

偶然橋上逢隣수          우연교상봉린수

約共偏舟倒百壺          약공편주도백호

 

담박함을 즐기니 한 가지 일도 없어

타향에서 산다 해도 외롭지만은 않네

손님 오면 꽃밭에서 시집을 함께 읽고

스님 떠난 평상가에서 떨어진 염주를 발견했네

장다리 밭에 해 높이 뜨면 벌들이 윙윙거리고

보리 까끄라기에 미풍 불면 꿩들이 꺼겅대지

우연히 다리 위에서 이웃 사는 어른 만나

작은 배 띄워 놓고 취하도록 마시자 약속했네

 

 

맑을 담(談)

머무를 박(泊)

 

맑게 머무르다.

욕심 없고 순박한 마음, 무위의 정신이다.

 

타지(유배지 강진)에서 냉대와 텃새를 받아가면서 온갖 고초를 겪던 시절,

이웃 주막 노파의 따뜻한 밥 한 끼와 농주를 얻어먹으며 그 주막의 한편에서 밥값 대신 제자를 가리켰던 개혁가.

그의 가슴속에 흐르던 지고지순한 열정은 맑게 머무르고 싶은 신념에서였으리........

 

어디 대흥사에서 초의선사가 다녀가면서 찻잎을 내려주고 염주라도 떨구었나 꽃밭가에 평상은 소박한 정취의 손님맞이 사랑채였네.

 

작은 배 띄워서 취하도록 마시자 했는가,

월출산 자락의 무위사에도 선생이 만들어 놓은 연못이 있었지.

물가에 나앉으면 술 생각이 동하고 술잔을 들다 보면 취하는 게 인생 아니겠는가?

농민의 삶이 자연과 함께인데 스스로 그러함은 평생의 스승일진대

일엽편주 띄어서 취하고 취해서 두 팔 별려 춤이나 추어 보세.

 

 

 

나, 정원, 강오

땅끝마을 쌍둥이 바위 앞에서

 

 

 

십오여 년 전의 일인데 들녘출판사 대표 정원이랑 강오,

그리고 출판사 대표들과 서울대 교수팀, 대한뉘우스 기자들과 30여 명 정도가 2박 3일로 남도기행을 한 적이 있었다.

 

해남 향심이 누나 집에서 저녁 늦은 식사를 정갈하게 하고 갈두 민박집에서 완도 명식이에게 횟감을 부탁하여 야심한 밤에 거나한 취기로 고향 자랑을 하기도 했었지.

 

그때의 일정이 대흥사 일지암 초의선사의 차 선구자 다도 강의와

미황사 금강스님의 달마산 수도처의 유래와 미황사 부흥의 애로를 듣고

도암의 다산초당에서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와 초의선사, 윤선도, 윤두서로 이어지는 교류의 친분들을 강의받고

무위사에서 다산의 흔적들을 찾아 담소를 나누기도 했었다.

 

관광버스로 다니는 시간 틈틈이 영전 선창가를 들려 재권이와 대남 이형님이 그물을 봐온 살아있는 싱싱한 붉은 참돔을 선창에서 배칫다리를 도마 삼아 시골된장을 찍어서 밥주발에 소주를 따라 영전식으로 먹기도 했었다.

철호 형수가 바지락을 한 바구니 주어서 다음날 해장국을 끊이고 남은 생선으로 아침부터 횟감을 만들기도 했는데

30명이 다음 스케줄도 잊은 채 아침부터 술잔을 비우면서 전부 너무도 좋아했었다.

 

영전에는 각 출판사에서 기증한 도서들을 병 채형에게 관리할 곳을 찾아 교회든 리사무소든 보관하면서 책 읽기를 바라며 책 2000권을 전달했다.

그때부터 인터넷으로 영전을 검색하면 도서마을로 뜬다.

병용이는 군청에 기증했으면 내 이름이라도 남을 것을 영전에 주어서 멍청한 짓을 했다고 하지만 나는 우리 영전 사람들이 책 읽기를 바라서였다.

 

그때 다산초당에서 영산홍 붉은 꽃잎의 강열한 다산선생의 열정을 보았다.

먼 외딴 촌구석에서 제자를 가리키고 책을 집필하면서 쇠퇴해 가는 가문의 처지와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수없이 편지를 쓰고 귀양가 있는 형제와 자식들에게 거르지 않고 소식을 전하며 말년에는 소학이 공부의 전부라 깨닫고 젊어 열정을 보였던 정치보다도 소학이 주는 가치에 치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외래 문물이 들어오고 천주교의 교리가 제도 속으로 파고들면서 파생되는 왕조국가의 계급구조가 흔들리는 양반들의

기득권 형태가 만연할 때 개혁가로서 피폐한 농민과 백성들의 계몽을 위해 마음가짐을 스스로 다져야 했던 담박한 심정을 노래했음이라.

 

 

 

다산초당에서 영산홍의 붉은 꽃잎과 함께 대한뉴스 기자가 담아서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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