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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2020. 5. 8 그때 그 어느 봄날 푸릇푸릇한 보릿잎이 껑충 자라 버린 어린날의 배나무 옆탱이, 산꼭대기에서 동네 어머니들이 장구와 북을 치며 춤추고 노래하던 광경을 잊을 수 없습니다. 샘 골목 어머니들이 모여 떡을 하고 안주를 만들어 화려하게 옷 단장을 하고 배나무 옆탱이로 온 동네 부인들이 봄놀이 즐기던 그때도 5월이었습니다. 그날의 즐거워하시던 어머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고 같이 흥겨워하시던 소중한 얼굴,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장구를 치면서 노래하시던 청지골 종표 큰어머니 술을 과하게 잡수시던 청지골 동원형 어머니 우리 마을 제사장이셨던 동네 까끔 당골래 한 씨 아주머니랑 어디서 오셨는지 무지하게 예뻤던 노래하는 소리꾼 여인들 집에서 술을 걸러 내시던 재권네 할머니 떡 하신다고 ..

2022.01.01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2019. 12. 9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 뜻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를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울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

2021.12.31

백석

2019. 12. 8 북방에서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았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쏜론이 십릿길을 따러 나와 울던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그때 아모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은금보..

2021.12.31

염표문 念標文

2018. 12. 16 고조선 11세 도해(道奚) 단군이 선포 天은 以玄默爲大하니 其道也普圓이오 其事也眞一이니라 천은 이현묵위대하니 기도야보원이오 기사야진 일이니라 地는 以蓄蔵爲大하니 其道也效圓이오 其事也勤一이니라 지는 이축장위대하니 기도야효원이오 기사야근 일이니라 人은 以知能爲大하니 其道也擇圓이오 其事也協一이니라 인은 이지능위대하니 기도야택원이오 기사야협일이니라 故로 一神降衷하사 性通光明하니 在世理化하야 弘㜋人間하라 고로 일신강충하사 성통광명하니 재세이화하야 홍익인간하라 하늘은 아득하고 고요함으로 광대하니 하늘의 도는 두루 미치어 원만(원융무애)하고 그 하는 일은 참됨으로 만물을 하나 되게(眞一) 함이니라. 땅은 하늘의 기운을 모아서 성대하니 땅의 도는 하늘의 도를 본받아 원만하고 그 하는 일은 쉼 없..

2019.01.05

들불

2018. 9. 30 바람은 일어라 이 미친놈의 세상에 난 횃불을 들리라 타오르라 저 들녘에 또 산하에 우리는 사랑한다 하늘이여 사람이여 고귀한 영혼이여 꽃피고 새 우는 봄날 같은 세상에 평등하고 자유로운 배부른 세상이기를 내 너를 위해 남 길터이니 오라 소낙비처럼 주저하지 말고 번개처럼 번뜩이며 폭풍처럼 휘몰아쳐 하얀 옷 입은 채로 어디 한번 바꿔보자 오 ㅡ 오 ㅡ 들불이여

2018.10.06

회선이

2018. 3. 11 며칠 전 영전에서 얼굴을 보고 왔으면서도 오늘 다시 보니 반갑다. 늙어 가면서도 입담은 여전하고 입은 역시 걸다. 그 답지만 나이 탓인가? 힘은 많이 빠졌다. 말을 올린지가 결혼하고 였으니 그전에는 그냥 샘 골목 어린 시절의 동무였었다. 객지에서 내려오니 결혼했다 길래 양지몰 꼭대기로 찾아가니 소금이랑 소꿉놀이하듯이 아옹다옹 살고 있었다. 이제 결혼했으니 말도 올리고 형이라고 할게요 했더니 소금이 가 금방 술상을 내왔다. 그 집 모방 앞 샘터 옆에는 노란 치자꽃이 피었고 동원이 형만 있었던 자전거 바퀴 도랑태가 그리도 좋았던지 어느 날 그도 굴리고 있었으니 남창 복기형이나 봉원이 형님이 구해 주셨을 것이다. 도방끌에 청지골 동원이 형만 안 보이면 그의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이김 질 ..

2018.03.21

유시민

2018. 1. 14 ㅣ 살아간다는 것 -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 상처 받지 않는 삶은 없다. 상처 받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다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 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힘과 능력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 사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렇게 자신의 인격적 존엄과 인생의 품격을 지켜 나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타인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다. * 정열적으로 살아왔던 젊은 시절을 뒤로하고 인간 본연의 내면세계를 충실히 살고자 하는 그의 모습을 존중하면서..

2018.03.21

백서

2017. 6. 25 변호사 한승헌 (83세) 거센 바람이야 어제오늘인가 아직은 목마름이 있고 아직은 몸 부름이 있어 시달려도 시달려도 찢기지 않는 꽃잎 꽃잎ㆍ 꽃잎은 져도 줄기는 남아 줄기 꺾이어도 뿌리는 살아서 상처 난 가슴 가슴으로 뻗어 내려서 잊었던 정답이 된다 . . 차라리 그런 식물이고 싶다 * 반공법 위반으로 재심 청구한 한승헌 변호사가 승소하였습니다. 실로 42년 만에 벗은 올가미입니다. 문득, 영국의 어떤 저명한 인사의 유명한 말이 떠오릅니다. - 너무 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 위의 시 '백서'는 한승헌 변호사의 3번째 시집 '하얀 목소리'에 실린 한 대목입니다. 그는 시인이기도 합니다. 유신독재 시절, 반공법 위반으로 5년의 옥고, 군사독재 시절, 김대중 내란음모로 3년을 더한 8..

2018.03.21

늙은이의 노래

2017. 1. 21 도덕경 제22장 휘면 온전할 수 있다 (겸손의 위력) 휘면 온전할 수 있고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움푹 파이면 채워지게 되고 헐리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나'를 품고 세상의 본보기가 됩니다.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기에 밝게 빛나고 스스로를 옳다 하지 않기에 돋보이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에 그 공로를 인정받게 되고 스스로 뽐내지 않기에 오래갑니다. 겨루지 않기에 세상이 그와 더불어 겨루지 못합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휘면 온전할 수 있다고 한 것이 어찌 빈말이겠습니까? 진실로 온전함을 보존하여 돌아가십시오. * "휘면 온전할 수 있다"는 말은 늙은이(노자) 이전부터 내려오던 말인 모양이다. 온전하려면 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

2017.03.27

말년

2016. 9. 22 ㅣ 말년 이태백은 말년에 [추포가] 17 수를 지어 세상에 내어 놓았다. 고독하고 쓸쓸한 것 같지만 주변을 노래하고 젊은 청년들의 로맨스도 담으면서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독작]에서는 꽃밭에 달이 찾아와 그림자와 셋이서 춤추며 노래하고 술을 마셨다. 달빛 내리는 가을 물가, 양재천의 수변무대 돌계단에 앉아 달을 보며 이태백을 생각한다. 우리는 비켜 갔지만 대만과 일본과 북한을 덮쳤던 태풍과 호우로 하늘은 맑고 구름은 밝으며 별은 쏟아진다. 이태백이 놀던 달! 그 달이 오늘, 나하고도 놀고 싶은가 보다. 처량하지는 아니하다. 빈 술잔마저도 없고 그림자의 손에 술병도 들리지 않았다. 달이 옆에 앉았다. 김건모의 [서울의 달]이 이어폰으로 밤하늘의 달을 마중한다. 초가을 바람이..

2017.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