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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에 물드는 봄

홍률 2016. 11. 2. 23:29

 

 

 

2015. 4. 13

 

 

 

 

 

 

토요일 오후,

지리산을 향해서 서울을 벗어났다.

밤늦게 도착하리라 했던 염려는 기우였고 조금 늦은 저녁식사 시간에 맞추어 숙소에 도착 여정을 풀었다.

떠날 때 양재천의 벚꽃은 만개했고 청계산의 앙상한 숲은 봄 햇볕 속에서 여직 물오르지 않는 모습으로 봄바람이 불어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잔가지의 흔들림이 없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느끼는 들녘에서 풍기는 봄 향취와 이제 막 변화가 시작되는 산천의 파스텔톤의 희뿌연 풍경이 생명의 경이로 놀라움을 자아내게 했다.

 

지리산의 깊숙하고 높은 자태는 저녁 해걸음의 어두음이 함께하면서 육중하게 시야로 들어왔다.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산그늘에 접어들때에, 비로써 전해지는 땅 내음이 무척 좋았고 파릇한 들풀과 진해져 가는 보릿잎이 우리를 반기는 것 같았다. 애초에는 남원 쪽을 택해 달궁 골을 지나 심원골로 들어가기로 예정했으나 구례 쪽으로 진입했다.

숙소에서는 아주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셨다. 이름을 개명하셨다고 해 '영지'인가 물었더니 닉네임이라고 하신다.

 

산채나물과 능이백숙의 시원한 국물맛에 지리산 산삼막걸리는 과연 일품인가 보다.

딸아이와 집사람은 연거푸 잔을 비운다. 한 잔만이라도 들이켜고 싶은 간절함이 혀끝을 감돈다.

산중의 밤은 무르익고 칠흑같은 어둠은 밤하늘의 별무리를 더욱 빛나게 해 괴괴한 스산함이 밤의 정적을 안겨준다.

 

도란거리는 이야기의 주제는, 일제 치하와 해방 후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이 깊은 산속까지 굶주림에 쫓기어 들어와 화전을 일구며 숨어 사는 서러움과 생을 연명하려는 모진 인고가 옛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이며, 과거 빨치산의 전북도당이 마지막으로 항거한 숱한 인명의 살상이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심신을 쉬게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보게 되는 지리산의 사계에 빠져들어 이 골짝 저능선 너머의 가슴 저린 사연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는 단순한 산행이다 보니 잊지 못하는 풍광의 사진과 함께 이골 저산 능선의 이야기도 함께 담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주고받았다. 지리산의 밤은 배 부르고 등 따스하면 되는 것이다. 노곤하게 밀려드는 하루의 잔상들이 꿈결로 다가왔다.

 

 

 

어제 가보지 못했던 달궁골의 골짜기를 돌아 구례를 지나 하동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섬진강가의 벚꽃은 지고 발가스름하게 새움이 트는 길가의 벚나무들이 그 나름대로 또 봄날의 풍경이 되었다.

강가에서 번져 올라가는 봄의 색채는 산마루와 능선마다 나른한 봄기운을 풍기며 연초록으로 변해가고 있다.

 

화개장터를 지나 녹차마을을 지나면서 꺼내 본 휴대폰에 친구 숙부의 부음이 찍혀 있었다.

장조카였던 친구를 어렸을적 부터 끔찍이도 대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도 상가에 문상가기는 틀린 거리 인성 싶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동화 같은 시골마을의 전경이 강줄기 따라 이어지면서 고향 같은 정겨움이 흠뻑 전해지는 그림 속의 풍경이 계속되고, 그렇게 쌍계사로 가는 길은 봄이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

좁은 폭의 골짜기에 자리 잡은 쌍계사는 여러 신장들이 지키는 몇 개의 일주문을 지나 계단으로 이어지는 각 전각들의 모습들이 배치와 어울려 조화로이 보였다. 벚꽃이 졌으나 아름다운 주변의 풍광 때문인지 상춘객들로 인해 절과 인근은 사람들의 물결이었다.

 

섬진강의 줄기를 따라 평사리로 가면서 섬진강의 특미인 재첩국으로 점심을 먹었는데 예전의 튼실한 알갱이는 아니고 너무나 자디잔 알갱이에 그저 실망스럽기만 했다. 평사리의 최참판댁 역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책이 이룩한 문학적 가치가 이처럼이나 큰 영향을 미치는구나 깨달게 하는 평사리의 전경과 규모였다.

 

산기슭에 위치한 최참판댁과 옹기종기 모여있는 소작인들의 초가에서 바라보는 넓은 들녘은 가슴속을 쓸어내리면서도 시원하게 펼쳐져있어 지주인 최참판이 농토와 사람들을 부리는 그 어떤 이면을 엿보게 했다.

사랑채에서 바라보는 넓은 농토와 섬진강가의 풍경들, 그리고 산들이 에워싸고 있는 사계의 절경들이 저절로 머릿속을 색칠해 나가는 것 같았다.

특히나 누각에서 술잔을 치면서 누렇게 물들어가는 들판을 바라보는 그 희열을 상상하면 그 무엇이 부럽겠는가....

책 속 인물들의 초가집들이 명패와 함께 자리 잡고 있어 새삼 그들이 연상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유채꽃이 노랗게 눈길을 잡아 끈다면 탐스런 이화는 하얗게 펼쳐져 발길을 멈추게 했다.

이렇게 산천은 사방으로 물들어 가고 봄햇살은 봄내음을 풍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