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28
이광사는 중국과 다른 우리나라의 독특한 서체인 [동국진체]를 완성한 서예가이자
[원교 필결]과 [원교 서결]이란 서예 이론서를 저술한 이론가이다.
이광사가 동국진체를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역사를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국조 단군부터 두문동에 은거한 고려 충신들의 이야기까지 30가지 일화를 30 수로 읊은 '동 국악부'를 지웠는데,
그와 처지가 비슷했던 정약용은 '해동악부 발문'에서
"문장이 깨끗해서 즐길만 하다"
라고 호평했다.
영조 즉위 후
글씨에 뛰어났던 이광사의 부친은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었다가 영조 3년(1727)에 죽고 말았다.
이후 이광사의 가문에는 '역적 집안'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이광사의 장남이 이긍익인데 방대한 역사서인 <연려실기술>의 저자이다.
연려실이란 이긍호의 호는 이광사가 서실 벽에 써준 것으로
이긍익이 평생을 고초 속에 산 부친을 얼마나 흠모했는지 알 수 있다.
이광사는 함경도 부령에 유배되었는데 변경의 유배객에게 많은 문인들이 찾아들자
진도로 이배 되었다가 얼마 후 신지도로 다시 이배 되었다.
이광사는 유배를 떠나며 부인이 자살했다는 비보를 듣고 '죽은 부인을 애도함(도망-悼亡)'이라는 시를 써서 부인의 영혼을 달랬다.
내가 비록 죽어 뼈가 재가 될지라도
이 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
내가 살아 백번을 윤회 한대도
이 한은 정녕 살아 있으리
수미산이 작은 개미 둑이 되어도
황하가 가는 물방울이 되어도
고불(古佛)을 천 번이나 땅에 묻어도
상선(上仙)을 만 번이나 묻어도
천지가 뒤바뀌어 태초가 되고
해와 달이 빛을 잃어 연기가 되어도
이 한은 맺히고 더욱 굳어져
세월이 흐를수록 단단해지리라
번뇌는 부술 수 없고
금강 석인들 뚫을 수 있으랴
감춰두면 응어리가 되고
울분을 토해 내면 세상에 가득하리라
내 한이 이와 같으니
당신 한도 정녕 이러하리라
두 한이 오래도록 흩어지지 않으면
언젠가 다시 만날 인연 있으리
신지도에서 정조 1년(1777) 유배생활 23년 만에 숨을 거두었는데,
이광사는 신지도 금곡리 마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해남 대흥사 대웅전 편액을 썼다.
이 편액의 글씨를 추사 김정희가 비판했는데 김정희는 청에서 습득한 서예 이론을 바탕으로
해남 대흥사의 초의선사에게 쓴 편지에서 대웅전의 편액에 대해 혹평을 했다.
일부에서 이광사를 박하게 평가하는데 대부분 추사 김정희의 악평 때문이다.
이광사는 소론이고
김정희는 노론이어서 반대 당파에 대한 당파심도 있었겠지만
8년간의 유배 생활을 제하면 순탄하고 화려한 인생길을 걸었던 추사로서는
전 인생이 쓰라렸던 이광사의 삶을 이해할 수 없었고,
삶을 이해하지 못하니 글씨도 이해할 수 없었으리라.
[동국진체]의 이광사 현판과 작품들이 지금도 전라도 곳곳에 걸리어 있으며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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