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3
ㅣ 겨울밤
긴긴밤의 자정 한가운데에서 일경에 쫓기는 어느 사내와 술 집작부의 하룻밤을 상상해 봅니다.
일제 치하,
헐벗고 가난하여 여기저기 유랑하다 두만강 건너 이국땅 북간도 술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북쪽 함경도가 고향인 쫓기는 사내와
따스한 남녘, 멀고 먼 전라도 땅에서 사투리를 몸에 담고 온 여인.
둘이는 삭풍 에이는 술막에서 두 낮 두 밤을
패인 보조개 바라보며
안경 너머 정다운 눈동자 바라보며
전라도 계집아이는 불안에 일렁이는 사내를 위해 사투리 섞어가며 이야기 상대가 되었으리.
함경도 사내 역시 이야기 속에 파묻혀 계집아이를 위하여 잠깐의 꿈도 꾸는데.
북풍한설 끝날 때를 기다려
봄을 기다려 봄을 기다리다가
끝내는 봄을 불러서 너를 보내 줄까 보다
분홍 댕기 손에 들고 너의 나라 돌아가라
사투리 찾아 돌아가거라 하면서도
얼음길이 밝아오면 노래도 자욱도 술막에 두고
또 어디론가 사라져야 하는 그런 이야기를....
오늘도 편파 월 이용악 시인에 두 편의 시를 자정이 다가오는 겨울밤에 잠 못 이루어 끄적여 봅니다.
*
전라도 계집아이
알룩 조개에 입 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계집아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만
어디서 흉 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아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맑은 고딕의 말을 품고 왔다
눈보라를 뚫고 왔다
계집아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 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다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러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거 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초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기차 구름 속을 다리는 양 유리창을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계집아이야
울듯 울듯 울지 않는 전라도 계집아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게
손때 수줍은 분홍 댕기 휘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보라 휘감아 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
오랑캐 꽃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띠 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 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 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 꽃.
너는 돌가마도 털 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 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 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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